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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2-04 15:12 조회2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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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의 역사》

부여(扶餘)는 서단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로서 기원전 6∼기원전 3세기사이에 발생된 국가로 보인다. 기원전 5세기까지는 서단산상층문화(청동기 문화)였고, 기원전 5세기에서 내려가게 되면 서단산하층문화로서 철기시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인 서단산하층문화에서는 요녕식청동검(비파형청동검)이 주로 발굴되었다. 길림시 동단산에 기원전 5∼6세기의 토성이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부여의 초기 도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서단산상층문화에서는 주로 돌관무덤과 함께 요녕식동검인 비파형동검이 나타나며, 하층문화에 이르러 부여특유의 토광묘와 함께 철기인 세형동검이 나타난다. 돌관무덤이란 땅을 파고 거기에 화강암판석을 덮는 형식의 무덤이며 토광묘는 일명 움무덤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냥 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것이었다. 부여가 탄생하는 시기인 5∼3세기에는 아직까지 고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즉,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 내지 혹은 고조선을 이루는 독립적인 연합국가 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부여는 기원전 6∼3세기에 발생한 국가이지만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3세기경의 기록이라고 보이는 《산해경》大荒北經에서의 不與=扶餘와 거의 동시대를 반영하는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연나라 북쪽 경계로 오환(烏丸)과 부여가 등장하였다.

부여는 동부여와 부여 그리고 북부여와 졸본부여 남부여가 있다. 여기서 남부여는 백제의 국호로 쓰였고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전신이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부여에 대해 논의가 있다면 동부여와 북부여 그리고 부여에 대한 것이다. 동부여는 삼국사기초기에 잠시 등장하고 북부여는 광개토태왕비문과 중국사서인 위서(魏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그리고 부여는 처음부터 중국측 사서에 기록이 나타난다.

노태돈 교수는‘부여는 하나이고 북부여는 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이기 때문에 북부여라고 한 것일뿐이다.’라는 말을 하였으며 동부여는 4세기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초기의 동부여는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선 북부여에 대해서 노교수는 그렇게 말하였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기 때문에 맞는 의견이라 할수 없다. 북부여는 엄연히 중국사서에 등장한다.

위서(魏書) 두막루(豆莫婁)전에서는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去洛六千里,舊北扶餘也.』라 하여 두막루국이 세워진 곳이 옛 북부여임을 밝혔고,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전에는 『開元十一年,又有達末婁、 達 二部首領朝貢.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라고 하여 달말루 즉 두막루사람들이 스스로 북부여의 후손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또한 노교수는 물길사신 을력지(乙力支)가 위나라에 갔을 때 말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김정배교수는 이에 대해 태화(太和)9년(486년)에 조공을 바쳤다는 大莫盧國을 두막루국으로 보고 을력지가 말한 것이 아니라 두막루국의 사신이 직접 말한 것이므로 위서 두막루전의 구북부여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의견을 내었으며 김정배교수의 의견이 노태돈교수의 의견보다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북부여에 대한 다른 기록인 신당서를 보자.
신당서에는 위에 언급한 이 기록다음에『高麗滅其國,遣人度那河,因居之』라고 나온다.
‘고려가 그 나라(부여)를 멸망시키자, 그 나라사람들은 나하(那河)를 건넜고, 그로인해 거기서 거주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즉 부여인들은 나라가 망하자 나하라는 강을 건너 두막루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서의 기록인『在失韋之東,東至於海』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와 나하(那河)에 대한 비정이 된다면 두막루국 즉 북부여에 대한 위치를 잡을 수 있다.

나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눈강설, 흑룡강과 송화강의 함류점, 하얼빈 대안설, 제 1송화강이북과 제 1송화강 하류의 호눈 평원설, 눈강 이동 제 1송화강 이북설 등이 그것이다.

이 의견들을 모두 축약하면 북부여는 지금의 눈강근처에 위치해 있었다고 비정할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북부여와 위치가 겹치는 나라가 있다. 바로 탁리국 혹은 고리국이라고 하는 부여의 선조국이다. 만약 북부여→부여, 탁리국→부여가 맞다면 북부여=탁리국은 성립될수 있다. 하지만 위치만 겹칠뿐 딱히 북부여와 탁리국이 동일하다는것에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북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런식으로 추정할 수는 있으나 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길이 없다.

이제부터는 논형에서 말하는 동명이 탁리국에서 도망쳐나와 세웠다는 부여국과 해부루의 동부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동부여라는 국명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처음 등장하며,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동부여에 대해 인용해보겠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에 앞서 부여왕(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산천에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바랐더니 한번은 그의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니 웬 금빛 개구리 모양과 같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서 말하기를“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구나!”하고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게 되매 세워서 태자를 삼았다.
그 뒤에 그의 부하 아란불(阿蘭弗)이 말하기를“어느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여기에 세우려 하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아란불은 드디어 왕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그의 옛도읍에는 어디서 온 지 알수 없는 사람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면서 거기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으매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 동부여편도 삼국사기의 내용과 거의 다 같다.
우리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보다도 먼저 건국된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동부여의 왕계는 부루왕→금와왕→대소왕으로 이어지며 그 위치는 東海쪽에 위치하여 있다고 한다.
보통 동해라고 한다면 우리는 동해가를 생각하게 되고 지금의 두만강을 동부여의 중심지로 보게 된다. 실례로 박경철씨는 동부여의 왕성을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연길시 동쪽 10km)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성자산산성의 위치는 북옥저의 접경지대에 있다고 하였으며 고구려의 책성(柵城)으로도 주목받는 곳이기 때문에 동부여의 영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만약에 성자산산성을 동부여의 왕성이라고 한다면 동부여의 영역은 북옥저와 겹쳐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동부여의 문화는 부여의 문화와는 전연 틀리게 된다. 왜냐하면 두만강문화는 보통 단결(團結)문화라고 하는데, 단결문화는 고고학적으로 서단산문화와 또 다른 색깔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해 가섭원으로 옮겼다고 하더라도 두만강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만강 북쪽 지금의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방일수도 없다. 그 지방은 수렵민족인 읍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기흥교수는 동부여의 중심지를 돈화시로 보고 있다. 그것또한 가능성은 가지고 있으나 맞는 학설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동쪽바닷가에 갔다고 했는데, 돈화시근처에는 목단강 이외에는 그렇게 불릴만한 곳이 없다. 그렇다 해서 두만강쪽이나 연해주쪽도 위에서 말했듯이 가능성이 없다. 물론 海자를 큰 강이라고 해석하여 목단강쪽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삼국사기에 그렇게 적힌 데에는 동부여의 위치가 바닷가에 있었거나 바다라고 취급할만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지 그냥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동쪽에 있는 海를 목단강으로 볼수는 없다.

그러면 동부여의 위치는 어디일까...
海는 바다를 뜻하지만 고대에는 거대한 호수또한 海로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바이칼호수를 일겉어 北海나 天海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므로 동쪽지방 가장 큰 호수를 동부여의 중심지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지금의 한가호와 목단강사이를 동부여의 중심지로 봐도 될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은 문헌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아직까지 이 지역의 고고학적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한 나로서는 단정을 짓지 못하고 가능성만 열어둔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화를 빗대어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부여는 삼국사기초 금와왕, 대소왕이 다스렸던 동부여는 아니라고 본다. 삼국사기초기에 보이는 동부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길림, 장춘지방의 부여이지 실제로 동부여라는 나라가 당시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삼국사기 초기 동부여에서 추모왕이 탈출하여 고구려를 세웠다는 설화는 후에 동부여 출신들이 만들어 낸것이라는 노태돈 교수의 주장이 현재까지는 가능성이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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